1965년부터 1986년 소위 “피플파워” 시민혁명에 의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망명하기까지 약 20여 년간 필리핀을 철권 통치하며 계엄령 선포, 민주주의 탄압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경제하락과 부정부패, 횡령, 독재, 사치, 정적 아키노 암살,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촉발되었다.
아시아 독재국가 사치의 상징 마르코스
임기 후반 부정선거로 인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결국 국방장관, 육군대장이 개혁파 군부세력은 마르코스에게는 사임할 것을 요구하고 암살당한 야당 지도자 코라손 아키노에게 충성서약을 하자 마르코스는 군부 개혁파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상황의 반전을 모색했으나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추기경마저 개혁파에 손을 들어주면서 20년간 부패와 독재의 상징이 물러나게 되었다. 부정부패의 끝판왕 마르코스의 일가를 한때 기네스 북에는 “정부의 가장 큰 도둑”으로 등재되었다. 1987년 기준 필리핀 GDP가 378달러 부정축제한 금액이 약 130억 달러 2022년 기준으로 보면 약 340억 달러이고 한화로 따지면 약 40조 원 정도 라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당시 실제 부정축제 금액이 300억~5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당시 마르코스의 연봉은 13,500달러였다고 합니다.
마르코스와 이멜다
부정축제의 방식과 운영은 국가자산, 해외원조, 미국의 군사원조금의 횡령등 닥치는 대로 치부하여 스위스, 미국등 해외은행에 분산 예치 비자금을 조성하고 유럽, 미국, 이스라엘등에 자신과 측근의 이름으로 대규모 부동산을 매수했습니다. 1980년 초연초 미국 맨해튼에 마르코스 일가의 명의로 건물 4채를 매수한 기록도 있습니다. 마르코스가 사실혼 관계의 여인과 세 자녀를 버리고 이멜다에게 한눈에 반해서 하루에 다이아 반지를 한 개씩 11일 동안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고 미래에 영부인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결혼을 승낙해 만난 지 11일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멜다는 사치로 유명한데 대표적으로는 3,000켤레 이상의 고급 구두를 가지고 있었고 필리핀의 대표적 휴양지 바기오로 휴가를 가서 파티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고 파티장 공사를 지시해서 지은 파티장이 현재까지 바기오 최대규모의 컨벤션센터라고 합니다. 파티장 완공 후 파티를 열고 행사 중 설탕이 부족하자 군용 헬기를 동원해 설탕을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필리핀 내에만 소유한 별장만 최소 50채에 달했고 별장 관리에 소요된 비용이 1985년 한 해에만 당시 가치로 1,05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현재 고령의 현직 필리핀 하원의원입니다.
마르코스의 가족들
마르코스의 자녀들도 유명합니다. 장녀인 아이미 마르코스 1984~1986년까지 단원제 의원을 역임했고, 1998~2007년까지 하원의원을 역임한 후 2010년부터 2019년까지는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역임 주지사직에서 물러난 후 필리핀의 상원의원이 되어 2023년 현재까지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집권 기간 동안 보석과 맨션들을 즐겨 매수했으며 그녀가 대학교 재학 시 강의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대학교 자체 정책을 깨고 그녀가 수업하는 강의실 한정해서 에어컨을 설치하도록 했고, 결혼 후에는 자녀를 필리핀에 두고 유럽을 여행할 때 자녀들에게 모유를 수유하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필리핀 항공의 특별기 편으로 모유 택배를 쓰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필리핀 항공의 운항이 지연되거나 취소되어 유럽에 살고 있거나 유럽을 여행 중이던 적지 않은 필리핀인들이 불평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3개의 대학교와 1개의 고등학교의 졸업증을 위조하고 2번이나 공개적으로 최우수 졸업한 것처럼 학력을 위조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프린스턴 대학교를 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인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으며, 경영학 석사 학위를 위조하기도 했습니다. 차녀인 아이린 마르코스는 1983년 당시 가치로 1,030만 달러가 소요된 결혼식을 하고 아버지의 축출 후에는 1985년 9월에 대통령 전용 요트인 앙 파울로(Ang에서 호화 파티를 즐기는 영상이 유출되어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장남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고모의 뒤를 이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를 역임했고, 아버지 사후에도 하원의원과 상원의원도 지내면서 아버지 마르코스의 만행을 정당화하였습니다. 2016년부터 지지자들을 동원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 등지에 '편향된' 언론이 간직한 '숨겨진 역사'라며 아버지의 집권기가 필리핀의 황금기였다고 선전했습니다. 허위, 조작된 주장이 필리핀의 신세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족벌과 파벌정치가 결국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2022년에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마르코스는 망명을 가는 중에도 꼼꼼하게 호화 물품들을 챙겨갔는데, 마르코스는 7억 1,700만 달러 상당의 현금 상자 22개, 보석 상자 300개, 20만 달러 정도의 금괴, 1억 2,400만 달러 상당의 미국, 스위스, 케이맨 제도 은행에 대한 예금 전표, 그 외 갖가지 사치품들을 챙겨갔다고 합니다. 마르코스의 망명 생활은 가족들과 호놀룰루에 있는 호화 주택에서 살면서 주에서 가장 비싼 곳 중 하나에서 쇼핑과 고급 식사를 즐겼으며, 심지어 1987년에는 미국 하원 외교 소의원회에 마르코스의 대화 테이프가 제출되며 1만 명의 용병과 최대 1800만 달러 정도의 무기를 동원해 고국으로 돌아와 코라손 아키노 정부를 전복시키고는 코라손 아키노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까지 폭로되었습니다. 그 후 마르코스는 일정기간 아키노 정부를 인정하지 않다가 1988년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ABC 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아키노 정부를 인정하며 아키노가 공산주의 반군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귀국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무리 한마디
마르코스는 1989년 1월 폐렴으로 입원하게 되었고, 신장과 심장병까지 겹치며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갔는데, 사망 직전에는 방문한 당시 필리핀의 부통령 살바도르 라우렐(Salvador Laurel, 1928~2004)에게 '필리핀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어주는 조건으로 부당축제한 재산의 90%를 필리핀 국민들에게 반환하겠다'라고 제안을 했지만, 아키노 정부와 아내 이멜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알려졌다. 마르코스는 1989년 9월 28일에 망명지 호놀룰루에서 72세의 일기로 사망했고,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병이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가족과 친인척의 대부분이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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