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a82ad" /> 0223f8" />https://www.thaian703.com/naver4b195c306c0ae0a01acd57168b005c51.html 재일교포……그들의 애국심
사회 & 문화

재일교포……그들의 애국심

by summer hunting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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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는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가혹한 경제 수탈로 삶의 터전을 약탈당한 일부 한국인이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일제의 징병과 징용 정책으로 상당수의 한국인이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습니다. 일본 내무성 조사 기록에 의하면 1939년부터 시작된 한국인 강제 연행자 수는 1945년까지 무려 67만 명이 넘었으며 이들은 주로 위험한 탄광, 공사장, 군수공장 등에 배치되어 온갖 박해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 초등학교 역사책에 강제징용이 아닌 자발적으로 참가한 것으로 왜곡 기술하고 있어 한일 간의 외교 갈등이 쉽게 정리되기 힘들다는 여론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약 60만 명 정도의 동포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정착하게 됩니다. 일본인과 동일하게 세금을 내면서도 취업, 진학, 사회생활에서 민족적 차별과 불이익을 받아 가며 때로는 생존권을 위협받고 갖가지 부당한 대우를 받아가며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으로 많은 교포사업가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재일대한민국대사관-사진-출처-연합뉴스
재일대한민국대사관 사진 출처 연합뉴스

재일교포 기업인 서갑호

1928년 당시 14세의 나이로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상점점원, 사탕 세일, 폐품 수집, 수건공장의 기계 기름칠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은 민족 차별과 편견을 견디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2차 대전이차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사업의 기회가 찾아왔고 군수 물자 매매로 많은 돈을 모으게 된 서갑호는 그 돈으로 폐기된 방적기들을 사 모아 사카모토 방적을 설립했습니다. 그때가 1948년 3월, 서갑호의 나이 서른넷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빠르게 성장해 갔고 1954년에는 오사카 방적을 설립하고 1956년에는 경영난에 허덕이던 히타치 방적을 인수하면서 서갑호는 일본 최대의 방적왕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 내내 서갑호 회장의 연간소득은 일본에서 5~8위를 기록하며 일본 면방업계의 실력자로서 일본 경제계에도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후 재일교포학교 교육사업에 힘써 금강학원 설립, 운영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한일국교 정상화 이전인 1951년 주일대표부는 사무실을 마련할 자금도 운영자금도 재일동포들의 후원금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당시 서 회장이 소유한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 중심 요지의 1만 218㎡ 면적의 땅은 예로부터 일본왕실의 친인척들과 일본의 권력실세들이 살던 집성촌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서갑호 회장은 이곳의 땅과 건물을 무상으로 주일한국대표부에 임대하다가 조국의 발전에 헌신한다는 뜻으로 1962년 모든 소유권을 한국정부에 기증했습니다.

마무리 한마디

현재 일본에 있는 재일본대한민국공관 10곳 가운데 9개 공관은 재일한국인들의 모금 활동을 통해 혹은 개인의 기증으로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해외교포가 다수의 공관을 기증과 모금운동을 통해 세운 일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재일교포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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